영화 <하얼빈> 기억하시나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다룬 영화입니다. 갑자기 왜 하얼빈 이야길 꺼내는지 궁금하실 텐데요, 사실 제가 그 영화에 개인 투자자들이 투자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플랫폼을 통해 소액이지만 투자를 했었거든요. 관객이 일정 규모 이상 들면 원금에 더해 수익도 정산받는 그런 구조였어요. 물론 손해 위험도 있었고요. 하지만 현빈, 박정민, 전여빈, 정우성 등 출연진도 화려했고 <내부자들>, <남산의 부장들>과 같은 선 굵은 영화를 감독한 우민호 감독이 연출을 맡았기에 어느 정도 흥행을 하겠다는 나름의 판단(...)이 있었습니다. 영화가 개봉하기 전부터 주변에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만나면 하얼빈 홍보를 하면서 영화 꼭 보라고 신신당부를 했었죠.
그랬는데 영화 개봉이 언제였냐면 2024년 12월 24일입니다. 아시죠? 그때 12월에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이죠. 12월 3일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근데 영화가 그 무렵에 개봉한 거죠! 잘은 모르지만, 영화 개봉일정에도 수많은 사람의 이해관계와 변수에 대한 고려가 들어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흥행 성적이 좋지 않았어요. 당연히 영화 작업을 위해 애쓴 사람들에 비할 바가 아니겠지만 제 슬픔도 꽤 컸습니다. 한창 움직이는 홍보머신마냥 어떤 대화를 해도 <하얼빈> 봐야 한다는 말이 자동반사처럼 나왔거든요. 그랬는데 그렇게 애를 썼는데...그렇습니다. 네네.
어떤 일을 할 때 내 돈이 들어가면 자세가 달라지는 걸 느껴요. 내 시간과 돈을 쏟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 태도가 달라진다고 할까요? 말로야 뭐든 할 수 있지만, 막상 상황이 닥치면 뭐든 할 수 없는 게 또 현실입니다. 여러 일이 생겼을 때, 나를 움직이는 건 거기에 얼마나 자원을 쏟았는지, 그러니까 매몰 비용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판단과 거기에서 비롯된 손익계산이 아닐까요? 물론 좋아서 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선 어찌 됐든 내 품을 들이는 노력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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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몰 비용이 커질수록 상황에 보수적으로 대응하게 되는 것 같아요. 반대의견을 들으면 날이 선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내 말이 옳고 네 말은 틀렸다고 생각하는 거죠. ‘다르다’는 감각이 아니라 ‘틀렸다’는 생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내가 이만큼이나 에너지를 쏟았는데 틀릴 수 없다는 마음이랄까요?
꼭 같다곤 할 수 없지만, 어느 분야의 전문가로서 유연한 태도를 보이는 건 쉽지 않은 일 같아요. 공력(?)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얻은 수많은 정보를 공고하게 다지게 될수록 새로운 것을 마냥 긍정하기 어렵습니다. 나의 기반을 흔드는 것에 쉽게 마음을 내어줄 수 없는 거죠. 하지만 환경은 변화하기 마련이고 옳다고 믿었던 것들도 그 변화에 맞춰 수정하고 보완할 필요가 있습니다. 새로운 지식을 계속 업데이트해야 하는 거죠. 그 작업을 더디게 할수록 낡은 것을 마냥 붙잡고 있는 상태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저 옛것만을 옳다고 외치는 상황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계속 좋아하기 위해서, 또 꽤 괜찮은 영역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선 부단히 좋아하고 아끼고 그만큼 주변에도 좋은 이유를 설명하는 한편, 지치지 않고 학습해야 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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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유연안정성(flexicurity)입니다. 우리나라에선 ‘노동유연화’라고 하면 보통 해고나 비정규직 같은 불안정한 개념이 떠오릅니다. 유연안정성은 이와 달리 임금 조정, 노동시간 조정, 업무 재조정과 같은 일하는 방식을 유연하게 바꾸지만, 사람은 자르지 않고 고용만큼은 지켜준다는 의미입니다. 일하는 모양은 유연하게 바꾸되 일자리는 지키는 것이죠. 그렇게 유연성과 안정성을 결합한 모델을 뜻합니다. 몬드라곤그룹은 유연안정성을 가진 대표적인 조직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연구자들은 경영진뿐 아니라 평조합원, 노조, 정부 관계자까지 40명을 인터뷰해 몬드라곤의 이 신화가 정말 현실에서 작동하는지를 면밀히 따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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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르 가전(FED)은 2013년 파산하며 협동조합으로서는 문을 닫았다. 다만 '파고르'라는 브랜드는 이듬해 카탈루냐의 카타(Cata, CNA그룹)가 사들여, 지금도 협동조합이 아닌 회사 소유의 가전 브랜드로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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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의 흥미로운 발견은, 파고르가 무너지기 전, 정작 조합원들이 재배치에 크게 저항했다는 겁니다. 연구자들은 저항의 이유를 4가지로 정리합니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부서에서의 높은 소속감, 낯선 업무와 새로운 환경에 대한 두려움, 몬드라곤에서 최대 협동조합을 문 닫게 두지 않으리라는 거짓된 안정감, 그리고 직무 재배치 대상으로 선정되는 것은 곧 무능한 사람이라는 낙인이 그 이유입니다. 일부 조합원은 재배치를 피하려고 의사 소견서에 없는 장애를 만들거나 병가를 냈죠.
더 주목할 지점은 파고르 노동자들이 노동자이면서 동시에 소유자라는 이중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설명이 좀 필요한데요. 파고르는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프랑스, 폴란드의 회사를 인수하면서 해당 국가의 노동자들에겐 조합원 자격을 주지 않았습니다. 파고르라는 이름으로 묶여있지만, 스페인 바스크 지역의 노동자들은 ‘주인인 조합원’이었고 프랑스와 폴란드의 노동자들은 ‘고용된 노동자’였던 겁니다. 이 구조가 위기 상황에서 노동자 연대를 가로막습니다. 파고르의 프랑스, 폴란드 자회사 노동자들이 국경을 넘어 함께 싸우자고 연대를 제안했을 때 몬드라곤 조합원들은 거절합니다. 노동자이면서 동시에 소유자였으니까요. 어찌 보면 협동조합의 주인이라는 정체성이 같은 노동자로서의 연대를 막은 셈입니다.
파고르 조합원들의 재배치 과정에서도 일종의 텃세가 확인됩니다. 잉여인력이 된 파고르 조합원을 받아줄 다른 ‘성공한’ 협동조합에서 이들을 정식 조합원으로 받기 꺼린 겁니다. 그래서 파고르가 문 닫고 7년이 지나도록 4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임시 재배치’ 상태에 머무르고 이들은 스스로를 몬드라곤의 파견업체 신세라고 자조합니다. 정작 실패의 책임이 큰 경영자들은 먼저 재배치되거나 승진하기도 했고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돈으로 하는 연대는 오히려 쉬웠다는 겁니다. 몬드라곤그룹의 110개 협동조합 조합원들이 임금을 1%씩 모아 7천만 유로를 빌려줬으니까요. 금전적 연대보다 일자리로, 사람을 끝까지 책임지는 연대가 훨씬 어려운 것이겠죠. 연대에도 난이도가 있는 것 같습니다.
몬드라곤그룹의 유연안정성이 예전처럼 작동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노동시간 조정은 짧은 위기에 작동했지만, 2007년부터 이어진 긴 위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익숙하고 옳다고 믿었던 방식을 환경이 이미 바뀌었는데도 붙들고 있었던 거죠. 게다가 단순 생산 위주의 노동자 다수는 훈련을 받지 못했기에 다른 직무로 옮기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연구자들은 이렇게 방치된 유연성은 유연안정성이 아니라 ‘유연불안정성(flexiprecarity)’으로 변질된다고 말합니다.
이상적인 모델로 소개된 몬드라곤그룹 역시 변화하는 시대 환경에서 한계를 보입니다. 협동조합이라는 이름만으로 호혜와 연대의 가치가 자동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협동조합이 놓인 상황이 변화한다면 호혜와 연대를 중심에 둔 제도의 설계와 실제 작동의 모습도 하나하나 변화해야 합니다. 조직도 결국 학습해야 하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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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오늘의논문’을 통해 인연을 맺은 분을 만났어요. 비영리섹터의 ‘다음’에 대한 고민이 많으셨는데, 고민에 머물지 않고 더 많은 사람이 비영리섹터에 진입해 일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동료들과 함께 <꽤 괜찮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는 멋진 이름으로 책을 내셨더라고요. 감사하게도 책 선물을 받아 살짝 자랑해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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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를 이야기하긴 쉽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을 내는 건 쉽지 않아요. 물론 대안이 없으면 문제 제기도 없어야 한단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노력은 해야 합니다. 누군가는 익숙한 자리에서 한발 더 나아가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만들어야 합니다. 더 나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그리고 그 ‘다음’을 이어갈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요. 우리가 앞으로 조금씩 나아갈 수 있는 건 익숙함에 머물지 않고 생각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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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논문
📌문의 diveintocoop@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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