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개봉한 지 한 달이 지나 영화관에서 보기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영화 한 편을 살짝 추천해봅니다. <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One Battle After Another)>란 영화인데요, 2시간 40분이라는 러닝타임이 무색할 만큼 몰입도가 높습니다. 부모 세대의 혁명은 실패했을지 몰라도 자유와 희망을 갈망하는 다음 세대의 싸움은 끝이 없다는 기대를 품게 하는 영화였습니다. 숏츠를 이어 붙인 듯 영화의 템포가 빠른데요, 여기에 적재적소에 흐르는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70년에 나온 이 곡은 당시 TV와 광고, 주류 미디어가 사회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하거나 혁명의 본질을 왜곡할 수 있다는 점을 비판합니다. 혁명은 화면 속에서 소비될 수 없다는 거죠. 미디어에 의해 소극적으로 해석되어 전달되는 사회의 모습은 실제 모습과 동떨어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회 변화와 혁명은 개인과 공동체의 직접 행동과 참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지난 겨울 경험했던 것처럼 말이죠. 어떤 것도 쉽게 주어지진 않아요.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어쩌면 가장 쉬운 방법일지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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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가족이 영국에서 생활하고 있어요. 제게 영국은 협동조합의 고향이라 괜히 주는 것 없이(...) 친근한 느낌을 갖게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현대 협동조합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영국의 소비자협동조합 ‘코업그룹(The Co-operative Group)’은 2024년 기준 약 620만명의 조합원, 113억 파운드(약 21조)의 매출을 보입니다. 영국 전역에 2,500개 이상의 편의점, 중형 매장이 있고 다섯 번째로 큰 유통업체이고요.
당연히 가족에게 협동조합 조합원으로 가입할 것을 적극 권했습니다. 일단 경험해봐야 협동조합의 진짜 의미를 알 수 있으니까요!
코업그룹의 조합원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협동조합의 가치와 원칙에 동의하는 누구나 조합원이 될 수 있는데요, 조합원 가입은 웹사이트, 앱을 통한 가입 등 간편하며, 1파운드(약 2,000원)의 출자금만 내면 되니 문턱이 높지 않아요. 조합원으로 당연히 총회, 이사회 등에서 한 표를 행사할 수 있고요! (참, 16세 미만 청소년 조합원의 경우 배당금 등 경제적 혜택은 받을 수 있지만, 의결권 등 실질적인 의사결정 권한은 없다고 합니다. 보호자의 동의와 관리 감독이 필요하며, 개인정보 보호 등 추가 안전조치가 적용되고요. 물론 만 16세가 되는 경우 자동으로 성인 회원의 권리를 갖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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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이 지역사회에서 제 역할을 하고, 조합원의 참여가 이를 뒷받침해주는 간단하지만 명확하게 협동조합-지역사회, 지역사회-조합원, 협동조합-조합원 각각의 관계를 연결해주는 프로그램이란 생각을 합니다.
영국의 코업그룹은 식품 유통뿐만 아니라 장례, 보험, 법률서비스 등 생활 전반의 다양한 영역에서 사업을 펼치고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 취약계층을 위한 서비스 비중이 큰 것도 특징이라 할 수 있고요. 한편, 대부분의 영국 소비자협동조합이 개인 조합원만을 회원으로 두고 있는 것과 달리 독립 협동조합(지역, 업종별 별도 법인 조합)도 조합원으로 두고 코업그룹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이중 구조입니다. 독립 협동조합과 코업그룹은 ‘연합’구조이지만, 각 협동조합은 분리된 법인입니다.
예를 들면, 영국 링컨셔와 인근 지역을 기반으로 1861년에 설립한 Lincolnshire Co-operative Society, 스코틀랜드와 북잉글랜드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Scotmid Co-operative Society (1859년 설립) 등이 코업그룹의 독립 협동조합 회원(Independent Society Members, ISMS)입니다. 이들은 조합원협의회 (Co-op Members’ Council)에 참여해 코업그룹의 전략, 사회적 가치, 운영 방향 등에 공동책임을 갖습니다. 더 넓은 이해관계자들이 함께 운영에 참여하면서 지역·업종 협동조합과 일반 개인 모두 코업그룹의 주인이자 의사결정권자로 역할하게 하지요. 로컬 커뮤니티 펀드가 작동할 수 있는 배경에는 지역별로 활동하는 협동조합이 조합원으로 참여해 의사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란 생각을 합니다.
해외 사례를 살펴볼 때 표면적인 부분을 슥- 훑어보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들춰보고 나면 제 개인적으론 남는 게 별로 없더라고요. 그런 결과가 나올 수 있는 전체적인 맥락을 확인하고 이를 우리나라의 현실에 비교 분석하는 작업이 뒤따라야 사례에 대한 이해가 좀 더 풍부해지는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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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살펴본 자료는 <Social solidarity economy and related concepts origins and definitions: An international perspective(2014)>입니다. 퀘벡 커뮤니티 경제 개발 기업(CDÉC)의 창립자이자 사회연대경제 증진을 위한 대륙간 네트워크(RIPESS)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온 이본 포아리에(Yvon Poirier)가 2014년에 발표한 논문입니다. 사회연대경제(SSE) 개념과 기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논문인데요, 이와 관련한 논문이나 보고서는 여럿일 테지만 깔끔하게 정리된 자료가 읽고 싶었거든요. 논문 전체를 번역한 자료는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저자는 사회연대경제(SSE)와 관련된 다양한 개념들의 기원과 정의를 글로벌 관점에서 정리합니다. 프랑스어권, 영어권, 스페인어권 등 문화권에 따라 같은 용어도 다른 의미로 사용되어 혼란이 발생하기 때문에요.
가장 먼저 정리한 개념은 사회적경제(social economy)입니다. 사회적경제엔 두 가지 정의가 있다고 보는데요, 하나는 영국의 로치데일 협동조합(1844년)에서 비롯된 개념으로 핵심은 소유의 형태, 즉 1인 1표입니다. 사람 중심의 조직으로 협동조합, 상호부조조합(mutuals), 비영리기업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또 다른 하나는 1995년부터 시작된 사회적경제의 또 다른 관점으로 제3섹터, 비영리 섹터와 유사한 개념으로 사용되며 보육, 건강, 돌봄 등 사회서비스 부문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앞선 사회적경제의 정의에 따르면, 누가 소유하고 통제하는지, 소유 구조가 중요한 데 비해 후자의 사회적경제 정의에선 어떤 서비스를 제공하는지, 즉 무엇을 하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후자의 개념은 정부의 복지가 축소되고 민간에서 사회서비스를 제공할 필요가 커지면서, 제3섹터로서 공공과 민간 사이의 사회적경제 역할이 강조됐다는 배경이 있습니다. 전자가 자본주의 대안으로서 ‘다른 소유 방식’을 강조하고 노동자 권리와 민주주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과 사뭇 차이가 있죠. 같은 용어를 쓰지만 다른 조직을 가리키기에 글로벌 현장에서 소통의 어려움이 생길 수 있다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두 번째로 살펴본 개념은 연대경제(solidarity economy)입니다. 연대경제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의 전환을 추구하며 대안 경제 시스템을 지향합니다. 사적 이익보다는 사람과 환경을 핵심에 배치하고요. 그리고 사회연대경제에 관한 개념을 설명하는데요, 사회연대경제도 Social Solidarity Economy가 있고, Social ‘and’ Solidarity Economy가 있습니다.
1990년대 후반, 100년이 넘게 존재한 협동조합은 오래되고 안정적이지만 일부는 일반 기업처럼 변하는 등 문제가 생깁니다. 이에 새롭고 혁신적이지만, 규모는 작고 조직도 약한 연대경제 그룹이 등장해 자본주의 체제를 바꿀 것으로 강하게 주장하죠. 이를 풀어가는 방식이 프랑스와 퀘벡에선 각기 달랐는데요. 프랑스에선 정부 주도로 포럼을 개최하면서 사회와 연대 경제라는 이름으로, and를 넣어 두 그룹(협동조합 그룹과 연대경제 그룹)을 한 자리에 모은 겁니다. 두 그룹은 함께 일할 때만 SSE라는 이름을 사용하고요. 한편, 퀘벡에선 단순히 협동조합이 좋다고 할 것이 아니라 연대 가치를 실천하는 협동조합이 되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두 그룹이 서로 논의를 합니다.
저자는 같은 SSE를 쓰지만 서로 다른 이해를 하고 있다고 정리합니다. 퀘벡식 해석에 따르면, 연대경제를 지향하는 사회적경제인 거죠. 그래서 모든 협동조합이 아니라 진짜 연대를 실천할 때 같은 울타리 안에 있게 됩니다. 한편, 프랑스식 해석은 사회적경제(전통)와 연대경제(혁신)를 통합된 것이 SSE로 이해되고요.
2010년 이후 국제기구에서 SSE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요, 협동조합과 새로운 운동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는 포괄성, 각국 정부가 받아들기 용이하다는 정치적 수용성, 그리고 프랑스 정부가 SSE를 공식 정책으로 추진하면서 그 영향력에 의해 더 논의가 확산됐다고요. 사실 현장에서야 비슷하게 활동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점차 공동의 이해도 쌓여가고요. 저자는 문제의 핵심은 용어 선택이 아니라, 그것이 현장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있다고 조언합니다.
사회적경제에서 사회연대경제로 용어가 바뀌고, 그에 맞춰 정책 변화가 조금씩 이뤄지겠죠.
사회연대경제라는 용어가 사용될 때 어떤 차이가 있을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차이가 있어야 하는지 그 자체도 잘 모르겠고요. 그런 혼란함이 있을 때 자꾸 원전이 될만한 무언가를 찾게 됩니다. 그렇지만 텍스트를 읽어도 뾰족하게 이해되지는 않아요. 그럴 때 사회적경제를, 사회연대경제를 만들어낸 현장으로 눈을 돌립니다.
이론 자체는 종종 추상적이라고 가정된다. 다시 말해서 뭔가 더 이론적인 것은 더 추상적이고, 일상에서 더 많이 추출된 것이다. 추출한다는 것은 떼어낸다, 분리시킨다, 멀어진다, 방향을 바꾼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론을 회수해야, 즉 이론을 삶으로 되돌려 보내야 한다. - 사라 아메드,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
책을 읽다 인상 깊은 구절이라 기록해뒀는데요, 이론이 왜 현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지에 대한 어느 정도의 답이 아닐까 싶어요. 추상적이고 추출된 이론을 다시 삶으로 가져와야 하는 것 같습니다. 사회적경제를 이루고 변화를 만들고 결과를 쌓아가는 그 과정 자체를 자세히 들여다봐야 할 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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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첫날입니다. 숨을 고르며 겨울을 기다립니다. 올해 안에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 보려 준비하고 있어요.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웹진 같은 것을 만들어 볼까 해요. 이렇게 공개적으로 이야기해둬야 부담을 느끼고 실천에 옮길 것 같아서 아직 아무것도 없지만, 구독자분들께만 살짝 말씀드려봅니다. 뭔가 만들어지면 말씀드릴 테니 꼭 놀러 오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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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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