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몇 달 사이 주변의 이직이 잦았습니다. ‘일’을 하기 위해 만난 동료지만, 매 순간 함께 머무는 공간에서 크고 작은 무수한 소통을 거치며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의지하고 기대게 됩니다. 평생(?)을 함께 일할 수 없다는 사실이야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헤어짐은 익숙해질 수 없는 일입니다. 떠나는 이유야 사람마다 각기 다를 테니 함부로 단정 지을 순 없습니다. 하지만 함께 일해 온 사람으로 안타까움과 상실감을 느끼는 동시에 어떤 책임감을 느낍니다. 우리가 함께 더 잘 해나갈 순 없었을까요. ‘만약’이란 말을 하는 것은 의미 없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만약에...’라는 가정을 해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함께 계속 일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했을까요?
일이란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의 목표를 세우고, 목표에 맞춰 계획을 짜고, 솔루션이 타당한지 동료들과 의논하고 또 그 과정을 공유하고, 피드백을 받으며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가고요. 일의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소통하며 자기 몫의 역할과 책임을 지고, 그 결과에도 당당할 수 있는 것. 그런 일을 할 수 있기를 꿈꾸지 않으시나요?
사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일과 관계된 타인과의 관계는 물론 나 자신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자기 일에 자부심을 지닌 사람으로 일하며, 그 일을 더 잘하기 위해 노력해서 그것이 결국 한 사람의 성장으로 이어지는 삶을 은연중에 기대합니다. 삶의 반은 어쩌면 일하는 나로 보낼 텐데 말이죠. 그렇다면 내 일의 의미를 찾고, 또 의미 있는 일이니 더 잘하고 싶은 거죠. 특히 ‘사회적 가치’를 고민하는 우리는 내 위치와 역할에 부합하는 최소한 일인분의 일을 충분히, 거뜬히 해내길 기대합니다.
일의 의미야 사람마다 다를 겁니다. <인공 지능의 시대, 인생의 의미>란 책에선 의미란 항상 개인적이므로 보편적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좀 더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의미는 지극히 주관적이지 객관적인 범주가 아니다. 내 인생의 의미는 나의 바깥세상에서 찾을 수 없다. 우리는 자기만의 특별한 인생의 의미를 고백할 수도 있고, 아니면 많은 것들 중에서 고르고 해석하기도 한다. 의미는 항상 개인적이므로 보편적일 수 없다. 키르케고르의 말처럼 의미 부여의 유일한 결정권자는 개인이다. 진화와 우주는 결정권자가 될 수 없다. 인간처럼 개방적인 존재, 혹은 니체의 말처럼 <확정되지 않은 동물>은 목적과 목표를 스스로 설정할 수 있다. 진화적으로 미리 정해진 목적(초지능의 생산)과 목표(우주로의 팽창)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중략)
일반적으로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최적화>가 아니라 만족한 삶이다. 합리성, 효율성, 진보는 생물학적 자연법칙이 아니고,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인간 존엄성, 정의, 자유 같은 가치와 비교하면 당연히 하위에 그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중심에 서야 한다>는 말이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일의 의미를 어디에 두고 계신가요? 동료들과 일의 의미를 단단히 다져가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계신가요?